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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론

오귀스트 로댕과 앙리마티스의 모더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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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 (August Rodin)은 지루하고 상투적인 동상으로서 침체기에 있던 조각을 소생 시킨 조각가 이다. 그의 작품은 공공조각과 개인조각으로 나눌 수 잇다. 대리석 작품은 아카데미 전통에 부합한 작업으 로 으로 볼 수 있고, '발자크 동상(Monument to Balzac)'처럼 전통적 표현법을 아예 무시한 작업들은 로댕 이 개인의 취향을 담아 표현한 최초의 개인조각으로 볼 수 있다.

역시나 늘 그렇듯, 새로운 것은 대단한 논란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아카데미에서는 이 작품을 "엉성한 스 케치"라고 퇴짜를 놓고, 로댕은 이후 파리 전역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 회고전을 열며 비판세력에 대 항했다. 이로써 로댕은 부르주아 사회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라는 낭만적 이상의 상징이 되었다.

마티스는 이런 로댕을 동경했고, 로댕에게 본인의 드로잉을 들고 가 조언을 듣고자 했는데, 로댕으로부터 실망스러운 대답을 듣게 되고 멀어졌다. 마티스는 로댕의 ‘걸어가는 남자'의 모델(베빌리쿠아)에게 비슷 한 자세를 취하게 하여 '노예'를 완성했다.

로댕의 '걸어가는 남자'는 정지되어 있는 동작 처럼 보이지만, 마치 곧 뛰어오를 것처럼 보이는 에너지를 갖고 있어 보인다. 반면 마티스의 '노예'는 정적이고 조각상 전체에 구불거리는 곡선이 강조된다. 이런 구불거리는 곡선, 들쑥날쑥한 유연성은 로댕의 ‘개인적인' 조각에 내재된 형식에서 상당부분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부터 지속된 서양 조각 전통(피그말리온 신화 : 조각가가 대리석에 생명을 불어넣고 사람 들이 그의 조각에 유기적 생명이 부여됐다고 믿게 만드는 것)에서 로댕은 벗어나려고 했다. 앞서 말했듯 이, 로댕은 공공조각에 있어서, 이런 전통의 완벽한 계승자이지만. 반면 개인조각 작업들을 보면, 로댕은 ' 프로세스 아트'의 대가로 볼 수 있다. 그의 작업에선 조각의 모델링이나 주조 등의 제작과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걸어가는 남자'의 등에 난 갈라진 상처, '보들레르'의 이마에 난 돌기 등 처럼 조각에 붙어있는 '비정상적인 것들'은 작가만이 남길 수 있는 하나의 표식 및 언어로 보여지길 원했다. 즉, 공공조각에서는 조각의 투명성(완벽함)을 작가의 언어로, 개인조각에서는 조각의 불투명성 (비정상적인 것)과 조각의 물질성을 작가의 언어로 택했다.

마티스의 '노예'는 메다르도 로소(Medardo Rosso)와 유사한 방식을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로소는 자칭 로 댕의 라이벌로, 스스로를 인상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로소의 조각은 회화적이었으며 대부분 정면상이었다. 이유는 빛에 의해 생기는 음영으로 작품의 윤곽이 드러나기 때문에 오로지 한 시점에서만 감상할 수 있었 다. 마티스는 로소처럼, 인체를 형성하는 구불거리는 곡선과의 통합을 뭉개며 조각이 회화로 변형되는 것 을 시도했지만, 이를 계기로 로댕의 물질성의 원리를 깨닫고, 이후 조각의 신체성을 훼손하지 않고 작가가 흙을 만진 흔적을 그대로 남겨두는 작업을 했다.

이렇게 마티스는 로댕의 특징을 그대로 모방하기도 했지만, 어떻게 다른지도 깨달았다. 로댕의 작품이 해 부학적으로 신체의 부분을 짜맞춘다는 면에서 마티스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는 해부학적 구조를 이해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반면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로댕의 이런 측면을 모방했다. 동일한 형태의 주조물을 다른 조각에 결합시키거나 다른 방식으로 배열하는 자르고 붙이는 작업은 피카소의 입체주의 구축물과 더불어 20세기 미술의 최고의 어법 중 하나로 여겨졌다.

아카데미 전통의 조각은 하나의 시점에서 봤을 때만 알아 볼 수 있는 조각이어야 했다. 즉, 부조의 배경은 시야에 보이지 않고, 관람자의 지식을 통해서만 재현된다. 하지만 마티스의 ‘등' 연작은 이와 정 반대였 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형상과 배경은 점점 같아지면서 구별이 모호하다. 이 작품은 *반 환영주의와 장식 적 효과, 즉 전면적(allover)인 특징으로 회화적 특징이 강한 그의 예외적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마티스의 '뱀처럼 구불거리는 인체' 작업을 보면 ‘등' 연작과 달리 관람객이 주위를 돌면서 봐야하는 입체 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형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예측할 수 없다. 전체를 보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모더니티의 조건을 이 마티스의 조각에서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