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전통의 회화가 상징계 공간이라면 뒤샹의 <에탕 도네>는 욕망의 공간이다. 욕망의 근원을 마주치게 하는 충동의 장으로서, 에탕 도네는 자화상으로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뒤샹은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생각한 ‘실재'를 복귀시킨 것이다. 뒤샹이 남기고 간 그의 마지막 작품 <에탕 도네>는 예술의 차원을 넘어 그가 제기한 의문을 뒤샹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낸 하나의 유희이다. (본문 중)
I. 들어가며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887-1968년)은 20세기 서양미술사에서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회화, 드로잉, 글쓰기, 실험적인 설치물 등과 같이 다양한 표현방법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세상에 내놓았다. 본 연구에서 다룰 <주어진다면: 1. 폭포, 2. 가스등(Given: 1. The Waterfall, 2. The Illuminating Gas)>, 일명 <에탕 도네(Étant donnés)>는 약 20년간의 제작기간(1946-1966)을 걸쳐 뒤샹이 죽고 1년이 지난 1969년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뒤샹이 의도적으로 사후에 공개되도록 한 작품으로 그만큼 미스테리하며 수수께끼처럼 남겨진 작품이다. 작품이 공개 되었을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작품을 선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시도처럼 보이는 <에탕 도네>의 구성은 사실 그의 새로운 도전처럼 보이지만 뒤샹의 마지막 작품 인만큼 그의 전작에서 드러났던 세계관이 총체적으로 잘 드러난다. 특히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심지어,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 Even)>, 일명 <큰 유리(The Large Glass)>에서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세계관이 <에탕 도네>에서 일관되게 발견되지만, 한층 더 진화한 형태로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 2장에서는 <에탕 도네> 작품이 가진 독특한 구성 방식에 대해 소개하고, 작품에 참여하는 관람객에게 집중하고자 한다. 이와 바로 이어지는 3장에서는 이 작품 구성의 중요한 요소로서 관람객의 등장과 함께 시작하는 이 작품의 작동 방식을 라캉의 ‘응시' 개념을 통해 이해해보고자 한다. 즉, ‘보는 것'과 ‘보는 자'에 대해 뒤샹의 마지막 작품인 <에탕 도네>를 통해 현 미술사에 어떤 새로운 질문을 던졌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II. 뒤샹의 <에탕 도네>에 대하여: 두 개의 작은 구멍과 관람객
(도판1)*
뒤샹의 <에탕 도네>는 일종의 '보는 장치’이다. <에탕 도네>는 벽돌로 둘러싸인 아치형 테두리의 낡은 나무문 위에 나있는 두 개의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작품이다(도판1). 이 때, 관람객의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이렇다. 마른 수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는 여자의 나체가 있고 그녀가 들고 있는 가스 램프 뒤로 왼 편에는 숲이 있고 오른쪽에는 폭포가 떨어진다. 관람객이 두 구멍을 통해 초점이 맞춰지는 광경은 다리를 과장되게 벌리고 있는 나체 사이로 보이는 체모 없는 성기이다. 이 광경과 관람객 사이를 가르는 나무문은 열리지 않는 문으로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나누고 있다. 오로지 관람객은 나무문의 두 구멍을 통해서만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도판2).
(도판2)*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뒤샹이 의도한 <에탕 도네>의 독특한 표현 방식이다. <큰 유리>는 유리라는 2차원의 평면과 유리의 투명성을 통해 겹치는 3차원의 배경 사이에 있는 작품이라면, <에탕 도네>는 3차원의 공간과 관람객 사이에 있는 작품이다. 즉, 나무문을 가운데에 두고, 문 안에는 뒤샹이 고안해 놓은 시점이 고정된 3차원 공간이, 문 밖에는 관람객이 서 있는 현실 공간으로 두 공간이 연결되지 않은 듯 보이지만 두 구멍으로 연결된 공간이다. 뒤샹은 서양 전통의 관습적인 시각 체계였던 ‘원근법’에 관해 과학적 사실이라고 여겨졌던 주장과 “망막”예술이라고 알려져 온 회화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 그는 작품을 통해 즉, 비유(allegory)를 통해 원근법을 해방시킴으로써 시각을 갖고 놀 수 있는 놀이의 대상으로 삼았다.* <큰 유리>는 뒤샹의 이러한 생각을 보여준 첫 작품이다. 투명성과 2차원 평면성을 지닌 유리는 유리 너머에 보이는 3차원 세계가 결국 2차원 평면의 유리에 달라붙은 것처럼 보인다. 마치 3차원인 공간이 평평하고 압축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에탕 도네>에서도 뒤샹의 이런 시각 놀이가 이어진다. 하지만 <에탕도네>에서 주목할 부분은 완전히 차단된 것처럼 보이는 단단한 나무문과 그 문에 난 작은 구멍이다. 관람객은 이 나무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그 문에 가까이 가서 구멍에 눈을 대보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이 나무문은 한 공간을 두 공간으로 나누었고, 관람객은 나무 문 밖에서 안으로는 결코 진입할 수 없다. 뒤샹은 이 장치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뒤샹은 서양의 전통적인 원근법에 기반한 회화가 2차원의 평면이라는 캔버스 위에 쏘아지는 눈의 관점과 평면을 타협한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 시각예술에서 원근법은 화가가 캔버스에 의도적으로 고정 해놓은 소실점을 봄으로써 작동한다. 하지만 뒤샹은 이 원근법으로부터의 해방을 <에탕 도네>에서 시도한 것이다. <에탕 도네>는 3차원의 공간으로 제작 됨으로써, 캔버스 혹은 나무나 벽에 원래부터 고정되어 있는 것을 제거했다. 오로지 관람자 만이 고정시킬 수 있다. 따라서 작품은 관람객의 존재 그리고, 관람자의 마음, 정신 혹은 심상에 생겨나며, 작품의 해석도 관람자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게 된다. 뒤샹은 예술작품의 창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축은 예술가와 관람객이라는 점을 직접 쓴 글인 창조적 행위(Creative Act) (1957) 에서 강조 했다.* 뒤샹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의 의도와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의 “차이”가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핵심이며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작품이 가진 상계 변수(art-coefficient)라고 말한다.*. <에탕도네>의 상계 변수는 벽 너머에 있는 누드 마네킹도 아니고, 폭포, 가스 램프도 아닌 바로 두 개의 공간을 분리하고 있는 이 작품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나무문이다. 왜냐하면 이 나무문은 관람객이 작품에 개입하도록 만드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에탕 도네>에서 주목 할 또다른 부분은 “두 개의 작은 구멍”이다. 우선 문을 마주한 관람객은 ‘문’이라는 막힌 장치를 통해 ‘문 너머에’있는 무언가를 보고자 하는 욕망을 느낀다. 뒤샹의 노트들이 담긴 <녹색 상자>의 머리말(Preface) 중에, <에탕 도네> 작품의 제목과 일치하는 “주어진다면, 1. 폭포 2. 가스등”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떤 잡다한 사건들의 연속(집합)에서 순간적인 정지 상태(혹 알레고리한 외형)의 조건들을 결정할 것이다. 한편, 정지된 상태(무수한 예외적인 가능성이 있는)와 다른 한편 가능성의 선택 사이에서 일치를 분리시키기 위해 어떤 법칙 하에 서로를 필요로 할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사실의 연속에 놓인다.” (Marcel Duchamp, Green Box, Preface)* 관객은 ‘무수한 예외적인 가능성이 있는’ 유비적인 외형(apparenc/appearance)에서 가능성의 선택(choice of Possibilities = apparition) 사이의 일치 즉, 실재를 이루는 잠재자가 된다. 또, 뒤샹은 그 아래에 순간적인 정지상태가 초고속 노출(exposition extra-rapide/extra-rapide exposure)을 불러일으킨다고 하였는데, 이는 유비적인 외형과 같다고 말한다. 즉 이는 다리를 벌리고 누워 나체의 모습을 드러내는 여자의 모습이다. 보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관객과 보여지기 위한 그녀의 욕망 사이의 찰나를 맞닥뜨리는 그 순간의 정지 상태를 관람객은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에탕 도네>에서 이 주어진 상황은 바로 그 문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이다. 관람객은 이 주어진 구멍을 통해서만 ‘안’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가능성이란 바로 관람객이다.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구멍을 통해 한 사람만이 그 내부의 광경을 맞닥뜨리게 된다. 매번 새로운 관객이 <에탕 도네>의 문 앞에 서게 되고, 관객은 그 순간 작품의 일부분, 작품의 하나의 얼룩으로서 자리한다.
III. 라캉의 ‘응시’ 개념을 통해 본 뒤샹의 <에탕 도네>: 주체의 충동과 그 실재
<에탕 도네>에서 중요한 요소로서 두 공간을 분리하고 있는 나무문과 문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은 모두 관람객이 이 작품에 어떻게 개입하는가에 대해 말해준다. 뒤샹이 의도한 이 장치들은 관람객이라는 무수한 가능성이 있는 관객/주체와 만나 <에탕 도네>를 작동시킨다. 이 작동 과정은 보는 자의 보려는 욕망을 필요로 한다. 라캉의 응시 개념에서 ‘눈’은 욕망하는 것의 주체이다. <에탕 도네>의 문에 뚫린 두 개의 작은 구멍은 이런 보고자 하는 욕망을 더 자극시킨다.
(도판3)*
라캉은 <도판 3>의 첫 번째 도식 (도표1)을 통해 17세기까지 회화 기법을 지배했던 원근법을 보여준다. (도표1)에서 기하학적 점은 대상을 바라보는 지점이다. 이 때 캔버스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대상을 다 포괄하지 못한다. 원근법은 이 욕망하는 주체를 달래주기 위한 것으로 캔버스에 보는 사람의 눈으로부터 방사상으로 퍼져나간 기하학화된(geometricized) 공간에 어떤 장면이 반영되어 그대로 새겨진 납작한 거울을 표현한 것이다.* 라캉은 화가의 그림 그리는 행위가 ‘눈으로 무엇을 끊임없이 보고자 하는’이 욕망을 채워주는 볼거리를 준다고 말한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 외부 세계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상징계의 모음을 설계하며, 세계의 날 것들의 위협을 달래기 위하여 그림을 그린다. 다시 말해, 화가는 예측 가능하며, 가정할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이런 위협적인 응시를 길들인다. 이렇게 화가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실재를 거세해 나간다. 따라서, 화가는 응시를 가리기 위해 보는 행위의 세계를 여는 시관적 장(시선의 세계)을 구축함으로써 화가는 “눈의 욕심 [식욕]”*을 지닌 자들을 충족시킬만 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며 그들이 응시하기를 포기하도록 유도한다.
두 번째 도식 (도표2)은 응시의 차원을 보여준다. 이 도식에서 응시는 삼각형의 꼭지점인 광점에 해당하며, 주체는 그 대변인 ‘그림’의 자리이다. 이 빛과 주체 사이는 스크린이 매개한다. 주체는 응시에 의해 “시각의 장 속에 붙잡혀 있고, 조직되며 사로잡혀 있다.”* 응시의 차원에서 주체는 시각의 장을 통제하는 자가 아니라 그 반대로 그림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인 것이다.(참고1)* 라캉은 빛의 경험을 통해 응시가 드러나며, 빛에 의해 드러나진 주체는 스크린 위에 얼룩으로 등장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를 뒤샹의 <에탕 도네>에 적용해보면, 응시를 마주보는 대변은 두 구멍을 통해 스크린을 보고 있는 주체 즉 관람객의 두 눈이다. 응시와 주체를 만나게 해주는 <에탕 도네>의 디오라마는 이 응시를 주체에게 보여주는 스크린인 것이다. 따라서, 기하학적 차원은 —2차원 평면에 3차원을 구현하는 원근법— 눈속임을 통해 응시를 감추게 하고, 보는 사람을 재현의 주체로 만드는 반면, 응시의 차원은 이미지/스크린을 통해 주체가 응시와 마주치게 하며,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동시에 나타난다.
(도판4)*
뒤샹의 작품 (1913)를 보면, 줄과 템플릿 그리고 유리판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1차원, 2차원, 3차원을 가지고 있다(도판4). 이 작품의 구성물은 서로 투사되고 교차되면서 서로 영향을 주게 된다. 예를 들어, 선(1차원)은 판(2차원)으로, 다시 말해 선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공간에서 초공간 (hyperspace: 4차원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움직인다. 작품 안에서 소실점과 관점의 변화가 움직이는 것이다.* 또한 뒤샹은 녹색상자에서 투명한 유리나 거울을 4차원에 비유하고 있다. 이처럼 뒤샹은 각기 다른 차원을 나타내는 재료들을 함께 콜라주 함으로써 각기 다른 차원들이 혼합 되고, 이에 관람객이라는 변수가 결합하게 된다. 이 변수는 한 차원으로 정의 내릴 수 없기 때문에 n차원의 작품이 나오게 된다. 이렇듯 뒤샹은 작품을 통해 관객이 4차원 —3차원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을 어떻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이전 작업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에탕 도네>는 문 밖의 고정된 위치에서 3차원의 공간으로 된 문 안을 바라본 그 정지된 순간이 하나의 타블로(tableu; 회화)로 사진 찍히듯(참고2)* 관람객에게 유입된다. 이 “회화”에서의 소실점은 현실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영역인 4차원의 소실점, 바로 주체를 응시하고 있는 그 빛의 지점이다. 2차원 평면이 지닌 고전적인 원근법에서 벗어나 오브제를 이용한 반 예술(anti-art)을 지향 했던 뒤샹은 그의 마지막 작품에서 구성물들을(compositions) 정교하게 배치시킴으로써, 아이러니하지만, 어떤 회화에서 보다도 완벽한 원근법을 실현 시킨 셈이다. 그는 <에탕 도네>를 통해 반 예술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진화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라캉은 주체가 시각의 영역과 맺는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빛이 나를 응시합니다. 그리고 그 빛 덕분에 내 눈 깊은 곳에 무엇인가가 그려집니다. (...)그것은 내게서 떨어져 미리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 어떤 표면의 반짝임이자 인상이지요. 그것은 기하광학적 관계 속에서 삭제되어버린 것 — 나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는 온갖 애매모호함과 변화무쌍함을 가진 그 장의 깊이 —을 개입시킵니다. 오히려 그것이 나를 사로잡고, 매 순간 나를 유혹하며, 풍경을 하나의 원근법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제가 그림(tableau)이라 부른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Jacques Lacan, 『세미나 11』, p.150) 뒤샹이 생각한 회화에서의 진정한 자유는 바로 라캉이 말한 ‘다른 어떤 것’이 아니었을까. <에탕 도네>의 문 너머를 ‘봄’과 동시에 ‘보여지는’ 주체는 순간적 정지상태로 찰나의 ‘응시’를 목격한다. 이는 곧, 뒤샹이 말했던, 외양과 실재 사이의 일치를 구현하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에탕 도네>에서 관람자는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그 순간 응시와 맞닥뜨리게 되며, 작품 속의 일부가 된다. 이와 동시에, 나체의 여성이 보여짐과 동시에 주체의 눈을 통해 스스로를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에탕 도네>는 고정된 위치의 두 구멍을 통해 응시하는 순간 멈춰버리는 그 장면을 다시금 주체에게로 되돌이키는 충동의 장이다. 라캉이 "그림이 경쟁하는 것은 외양이 아니라 플라톤이 외양 너머에 있는 이데아라고 지칭한 것”*이라고 말처럼, 뒤샹은 <에탕 도네>의 문 앞에 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관람객과 뒤샹이 문 뒤에 실제보다 더 실제같이 정교하게 꾸민 3차원 공간의 구조물과의 일치을 이루어냄으로써, 실재를 거세해 나가는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를 발견할 수 있는 장으로서의 그림 즉, 주체의 실재를 발견하는 장이 된다.
IV. 마무리하며
뒤샹은 <에탕 도네>라는 놀이에 관람객을 참여시켜 그 안에서 무엇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 회화에서 3차원을 2차원으로 옮기기 위해 사용되었던 원근법에 의문을 제기했던 뒤샹은 <에탕 도네>에서 3차원의 공간을 만들고 관람객이 직접 보게 함으로써 3차원 그 너머의 차원을 보게 한다. 그가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예술가가 아닌 관람객이라는 것을 강조했던 것처럼, <에탕 도네>의 작품은 작품 안에 정교하게 설치 된 어떤 구조물이 아닌, 관람객의 존재와 관람객이 보는 것 그리고 느끼는 것이 전부다. 관람객이 문 앞에서 부동의 자세로 보게 되는/볼 수밖에 없는 그 장면은 마치 2차원 평면의 회화처럼 보인다. 3차원의 공간에 설치된 <에탕 도네>는 원근법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정지된 상태로 관람객에게 보이는 장면은 가장 원근법에 충실한 장면이 된다. 또한 본 연구는 시각 놀이 상자 같은 이 <에탕 도네>를 자크 라캉의 ‘응시’ 개념을 통해 다시 살펴보았다. 문에 뚫린 고정된 위치의 두 작은 구멍을 보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지어 라캉이 이야기 한 시관적 장의 충동에 대해서 고찰해보았다. 눈으로 경험하는 예술인 그림에 대해서 <에탕 도네>는 주체의 결여를 마주치는 장인 것이다.
서양 전통의 회화가 상징계 공간이라면 뒤샹의 <에탕 도네>는 욕망의 공간이다. 욕망의 근원을 마주치게 하는 충동의 장으로서, 에탕 도네는 자화상으로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뒤샹은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생각한 ‘실재'를 복귀시킨 것이다. 뒤샹이 남기고 간 그의 마지막 작품 <에탕 도네>는 예술의 차원을 넘어 그가 제기한 의문을 뒤샹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낸 하나의 유희이다.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이 유희를 통해 20세기 서양미술사의 점을 찍은, 그리고 21세기 현대미술의 지평을 열어준 뒤샹의 세계관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별표표시는 본 원본에 각주가 있다는 표시. 본 웹에서 상세 표기는 생략 함. 각주 중에서 출처 표기 이외에 이해를 돕기 위한 각주는 아래 (참고n)으로 기재 했으며, 출처 표기 각주는 참고문헌(reference) 아래에 일괄 기재 함.
(참고1) 라캉이 말한 정어리 통조림 깡통 이야기를 참조. “깡통은 빛의 점 point of light으로부터, 나를 바라보는 모든 것이 위치해 있 는 그 점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라캉은 “내가 지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보였는데,” 이것은 커다란 어려움 을 무릅쓰고 가혹한 자연과 투쟁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어부들에게 비치는 라캉 자신의 모습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그 그림에서 빠져 있었다”고 라캉은 말한다. Jacques Lacan,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1977) (eng.tr.), London, Penguin Books, 1991, pp. 95-96 .
(참고2) 라캉은 응시가 빛을 구현하는 도구가 되며, 그 도구를 통해 주체가 ‘사진-찍히게[빛에 의해 그려지게] 된다고 말한다. Jacques Lacan, 『세미나 11』, 맹정현, 이수련 역 (새물결, 2008), 165.
(도판1) 마르셀 뒤샹, <<주어진다면: 1.폭포2.가스, 등>>, 문의 구멍을 통해서 본 내부
(도판2) 마르셀 뒤샹, <<주어진다면: 1.폭포2.가스, 등>>, 1946-66, 입구의 나무문 사진, 아상블라주; 나무로 된 문, 벽돌, 나뭇가지, 가죽, 쇠, 그밖의 것들, 242.5X117.8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출처: https://www.theartblog.org/2009/09/michael-taylor-tells-all-a-talk-on-etant-donnes/ (2019 년 6월 22일 검색) (도판3) 자크 라캉의 세 가지 삼각형 도식
(도판4) 마르셀 뒤샹, <<세 개의 표준 정지 장치>>, 1913, 세 개의 실 (100cm), 세 개의 캔버스(13.3 x 120 cm), 세 개의 유리 패널 (18.4 x 125.4 x 0.6 cm), 세 개의 나무판 (6.2 x 109.2 x 0.2 cm), 1913, 출처: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78990 (2019년 6월 22일 검색)
Jacques Lacan, 『세미나 11』, 맹정현, 이수련 역 (새물결, 2008),
Marcel Duchamp, The Essential Writings of Marcel Duchamp, Edited by Michel Sanouillet and Elmer Peterson. London: Thames and Hudson, 1975.
방명주, 「제프 월의 여성을 위한 사진 작품분석 - 자크라캉의 응시 개념을 중심으로」,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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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 Hoy, “Marcel Duchamp – Etant donnes: The Deconstructed Painting, translated by John Irons, Articles”, TOUT-FAIT: The Marcel Duchamp Studies Online Journal, Vol.1/Issue3, Dec,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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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 Duchamp, “Creative Act”, 1957, http://www.fiammascura.com/Duchamp.pdf (2019 년 6월 10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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