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술이론

스테판 모라브스키의 예술과 정치 & 존 버거의 사회주의 미술의 문제

존 버거에게 예술가는 형식적인 아름다움, 조형미와 같은 시각언어로서의 예술을 탐구할 의무가 있으며, 예술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로서 자기만의 능력을 통해 새로운 시각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 결국 창의적이고 정교한 시각언어를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시각물은 사회를 때로는 위로하고, 단결시키는 상징으로서 사회학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본문 중)


I. 들어가며

 스테판 모라브스키 (Stefen Morawaski) 와 존 버거(John Berger) 모두 1920년대-2000년대 초반에 활동하였다. 두 사람은 냉전시기를 거치면서, 마르크스주의 미학에 영향을 받았다. 스테판 모라브스키 <예술과 정치>는 1971년에 발표된 글로,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주목한다. 특히 예술적 표현수단을 허용하거나 불허하는 사회적 메커니즘 즉, 정치권력의 통제 하에 행해지는 검 열에 주목하며 논의를 이끌어 나간다. 존 버거의 <사회주의 미술의 문제>는 존 버거가 1959년에 쓴 글로, 특히 1870 년대에서 1920년대 화가들이 해낸 회화의 발전이 사회 구조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사회 혁명적 의미를 실현해 나아갔는지에 대한 논의를 풀어 나간다. 또한, 시각예술에 있어서 ‘본다는 것’에 대한 그의 논의와 함께 사회에서 회화가 차지 하는 위치, 회화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II. 스테판 모라브스키의 <예술과 정치>

1. 권력 아래의 예술 (p.238-240)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검열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권력자는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최고의 지배질서"를 만들어내며 검열을 정당화 시킨다. 그들과 뜻을 함께하는 예술가는 건전한 정신을 가진 예술가로 간주하고 깊은 연대감을 표하며, 그들과 뜻을 달리하는 예술가는 퇴폐적인 자로 간주하며 엄벌을 처한다. 즉, 예술은 필연적으로 정치권력의 통제 하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해, 세 가지 예비사항은 1) 권위형 — 제3제국 나치, 그리스의 군사 통치자, 스페인의 독재자 등 과 같이 예술가에게 관대하지 못한 형태(검열을 비롯한 폭력)가 있다. 2) 권력의 협력자로서의 예술 — 혁명이 일어나는 기간동안 예술가는 혁명을 일으키려는 세력(예비 권력자)과 연대감이 생기며, 예술가들은 강제 당하지 않고, 자발적인 참여와 선택이 가능하다. 권력은 예술을 이용하며 정치 예술을 기대한다. 3) 혁명적 예술가와 추종자 — 혁명적 예 술가는 혁명의 감시자로서 역할을 하며, 그들의 자유를 위협할 경우 보복하며,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행태를 고발 하며, 또다시 혁명을 도모한다. 하지만, 추종자인 경우, 권력을 쥐고 있는 자의 등에 업혀, 해당 권력이 그어놓은 안전지 대 (검열의 한계)에 머무른다. 그들은 검열의 선을 넘지 않는 대가(정신적 자유를 훼손한 대가)로 육체의 편안함을 누린다.

  • 추종자의 예술작품도 예술의 본질과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형식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이에 동의하는가?

“다만 우리의 견해로는 어떤 주제도 예술의 영역에서 자동적으로 제외될 수는 없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으로 족하리라. 예술의 본질과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예술작품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의 형식적 구조이다.” - p.240 line 3 from bottom

2. 소명을 지닌 예술가 그리고 이들의 사회적 역할 (p.241-243)

“예술가의 소명은 집단의 목표를 실현 시키는데 그의 기술적 재능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목표는 예술 외적인 것으로, 인간적인 이상에 맞추어 세계를 변혁시키기 위해,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 투쟁을 한다.” 이들은 모두 앞서 말한, 혁명적 예술가로 소명을 지닌 채 사회에서 그들의 역할을 수행해 낸다. 그렇다면, 소명을 지닌 예술가들의 사회적 역할은 정치가들과 어떻게 다른가. “예술가는 총체로서의 삶이 불만족스러운 것일 때, 그 안의 어떤 개별 사건이 만족스럽다 해도 그 중요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반면 정치가는 개별적 사건들로 부터 만족을 찾아내려고 한다.” 다시 말해, 정치가들은 불만족스러운 것들을 기각 즉, 검열 시킨다. 따라서 소명을 지닌 예술가들은 기회주의적 정치가들과 마주 앉아, 타협할 수 없는 것, 불리한 점, 불가피한 실패, 불만 등을 주제로 대화해야 할 것이다.

  • 생업으로서의 예술가도 예술가인가?

“형식이나 양식의 완전성을 예술의 기본적 목표로 삼았 던 역사의 여러 시기는 성과 없고 퇴폐적인 것임이 판명 되었음을 알고 있다.”- p.241 line 8

  • 소명 있는 예술가에게 예술은 오히려 집단 목표를 위한 도구 아닌가?

“예술가의 소명은 집단의 목표를 실현시키는데 그의 기술적 재능을 사용하는 것 이다.” - p.241 line 10

3. 검열의 존재 (p.243)
검열의 존재는 사회-정치적인 미성숙의 결과이다. “동시대인들에게 위험한 것은 실제로 예술가가 아니라, 그로 하여금 이의를 제기하게 하는 그를 둘러싼 상황인 것이다. 사회를 위협하는 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예술가의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정신에 의해 도전받는 세계(일상적)이다.” 예술의 힘은 결코 사회를 위협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 미비한 힘을 지닌 예술을 억압 하려는 검열의 행위는 도리어 권력의 힘이 약하다는 것을 드러내보이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예술가와 정치가가 사회적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소명 있는 예술가의 소명들을 묵살시키지 않고 관대하게 대하며, 그들의 소명을 예민하게 그리고 동등하게 여겨야 한다. 예술가의 작품이 사회를 위협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서는 검열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4. 정치검열을 대하는 예술 (p.244)
문명이 발전할수록 검열의 한계는 낮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검열이 존재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검열의 존재를 대하는 예술가는 침묵하거나 창작을 지속한다. 하지만 검열로 인한 예술은 정상적이지 못하며, 이 때 예술을 수용하는 대중이 예민하게 그 작품의 이면에 있는 새로운 언어를 이해하게 되면, 예술에 대한 검열은 사라질 것이다. “검열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제도이지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 작품은 존재하며, 그것의 존재를 달리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 예술작품이 요구하는 모든 것은 바로 공개적 토론 뿐이다.”

(위 단락 구분 및 단락 별 부제는 발제자가 붙인 것이며, 1번과 2번 아래의 질문과 관련 인용문도 발제자가 붙인 것.)

III . 존 버거의 <사회주의 미술의 문제>

  1. 1870-1920년대에 활동했던 마네, 모네, 드가, 세잔, 고갱, 반 고흐, 야수파들 그리고 입체파 화가들이 사회구조적인 관점에서 혁명적인 예술가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해 낸 회화기법의 변화, 주제의 변화는 사회적인 관점에서 진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p. 251)
  2. 이 미술가들이 사회에서 고립 됨에 따라, 관습에 의존하지 않게 되며, 자신들과 타인을 새로이 보이게끔 하는 방식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즉,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이는 새로운 시각에 관한 것인데, 똑같이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시각이 포함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감각에 충실한 세잔이 생 빅토와르 산에 대한 자신의 감각이 산이 반사한 빛의 세계의 일부분(주관)일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산의 물질적 세계의 일부분(객관)임을 깨닫는다. 이는 화가의 주관적 세계 뿐만 아니라 객관의 세계까지 함께 드러내보임으로써 혁명적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세잔 뿐만 아니라, 반 고흐, 드가, 로댕 등과 같은 여러 미술가들이 각각 상이한 방식으로 새로운 발견을 한 것처럼 이들은 역사적 발전에 따라, 진정한 혁명적 의미를 실현하였다. (p.252-253) 
  3. 새로운 미술, 인상주의 화가들은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 우리가 눈을 통해 본 것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의 융합임을 보여 준다. 빛과 대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우리의 눈과 머리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우리는 A라는 대상과 B라는 대상 사이를 주목하고 기억에 의존하여 새로운 상을 만들어 낸다. 이 상은 결코 총체적인 현실을 담아내진 못한다. “어떠한 미술작품도 현실의 전체적인 복합성에 부응할 수 없다. 모든 미술작품은 관습에 기초하여 현실을 단순화시킨 것이며, 관습 자체는 그것을 창출해 낸 특정 사회계층이나 계급의 이해에 상응하는 대상의 특정 측면을 강조한다.” 즉, 미술이 결코 사회 전체를 담아낼 수 없으며, 미술은 오직 사회의 특정 부분만을 강조할 수 있다. (p.254)
  4. 위에서 언급한 내용대로, 새로운 미술들은 기존의 관습들을 단순화 시키고 변형되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레제나 마티스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 만큼이나 변형을 겪은 것이다. 다시 말해, 변형된 것이 어느새 관습이 되고 그 관습을 기초로 다시 새로운 변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미술은 세 가지 미술 (자연주의 / 형식주의 / 리얼리즘 ) 방식 중 하나로 구현 되는데, 이 세 방식 모두 단순화와 변형을 거치게 된다. (p.255)
  5. 미술이 이러한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모두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기 떄문에 가능하다. 고립되어 만들어진 이것은 민중에 속하지 않지만 (사회적이지 않지만), 결국 이들의 실험 결과는 “인간 생활과 행복에 충분히 적용되기 위해 사회주의의 성립을 기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핵무기는 악이지만 핵무기를 만들 수 있게 한 지식마저 잃을 수 없다는 예시처럼, 민중과 거리가 먼 발치에서 이들이 발견해낸 회화기법들은 사회에서 “긍정적 유용성”을 갖고 있다. (p.255)
  6. 그렇다면, 이들이 발견해낸 예술의 사회적 효용/기능은 무엇인가? 맨 처음 회화의 기능은 문맹의 대중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문맹률이 낮아지면서 문학이 그 기능을 이어받았다. 곧이어 시각적 이미지가 문자보다 더 뛰어남에 따라 영화가 그 기능을 이어 받는다. 그러나 시가 문학으로서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내는 것처럼, “위대한 회화란 인간이 어떻게 현실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가를 시각적 방법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우리의 시각의 의의를 확장하고 다듬는 수단이다.” (p.255-256)
  7. 로테르담에 세워진 자드킨의 조각상[도판1]을 보면, 두 가지의 주제(승리와 실패)를 동시에 담고 있다. 하나의 조각상에서 두 가지의 주제를 동시에 담고 있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겪는 현실이 바로 그렇게 명백한 모순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을 암시하듯, 로테르담 시민들로 하여금 현실보다 더 현실에 가까운 경험을 하게 만든다. 자드킨이 형식적으로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세잔, 브라크, 피카소 등이 없이는 불가능 했다. 이들의 실험과 탐구가 로테르담의 시민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시각적 언어의 탄생을 위한 재료를 만들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p.256-259)

[도판1] 자드킨 조각상 

 

IV. 나가며
스테판 모라브스키의 <예술과 정치> 그리고 존 버거의 <사회주의 미술의 문제> 이 두 텍스트를 함께 두고 읽었을 때, 논점이 서로 비켜나가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테판 모라브스키는 예술가를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에서 해내야하는 역할을 분명하게 지정해놓았다면, 존 버거는 예술가를 역사적으로 계승되어지는 시각 예술의 언어를 창조해내는 사람으로 본다. 존 버거의 텍스트에서 “다시 말하지만 나는 초현실주의와 큐비즘, 추상예술과 피카소의 걸작들 사이의 본질적 차이, 미래주의와 그것의 파시즘과의 관련성 및 페르낭 레제의 뛰어난, 진정 사회주의적인 작품과의 본질적 차이를 상세히 분석할 여유가 없다.”고 말하듯이, 존 버거는 예술가가 작품에 담고자 하는 어떤 분명한 메세지 보다, 관습의 단순화와 변형으로 하여금 탐구된 새로운 시각 언어를 ‘사람들이 어떻게 볼 수 있는가’에 대해 더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존 버거에게 예술가는 형식적인 아름다움, 조형미와 같은 시각언어로서의 예술을 탐구할 의무가 있으며, 예술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로서 자기만의 능력을 통해 새로운 시각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 결국 창의적이고 정교한 시각언어를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시각물은 사회를 때로는 위로하고, 단결시키는 상징으로서 사회학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동시대 배경의 두 저자는 이처럼 차이가 존재 하지만, 공통적으로 두 글 모두 예술가 혹은 예술작품으로 하여금 사회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어떻게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인가에 대해 예술의 사회학적 의미에 관해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글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