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수 작가의 올해의 작가상 2019 전시 : <대화프로젝트 vol.4 – 우리가 모르는 우리>
예술이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제도 안에서 작동되어야만 하는 부품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예술의 탈을 쓴 말장난이나 휘발되는 놀이에 불과할 것이다. 사회 안에서 예술이 공공적인 기제가 발휘되기 위해서는 예술가의 독창적인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 우선이며, 이 다음 관객들의 라운드 테이블에 이를 올려두고 공론화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본문 중)
1. 들어가며
한국에서 공공미술은 1988년 ‘1%법’, ’건축물미술장식법’으로 제정 되면서 시작되었는데,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지역 공동체구성원이 참여하는 커뮤니티 중심의 프로그램화 된 공공미술로 변화하고 있다. 공공미술의 변화와 확장을 이끈 사회적 배경으로는 정부 주도 하에 문화예술추진정책에 의하여 방대한 양의 예산이 투입되며 공공성을 강조하는 문화예술 관련 지원 사업이 실시된 것이다. 이로 인해, 2000년대 이후 한국은 공공미술의 확장을 급속하게 경험하고 있다. 곳곳에서 물질적인 공공미술과 비물질적인 공공미술을 쉽게 목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예술가들에게 일자리 창출과 창작활동 지원의 계기를 마련해줌과 동시에 지원사업에 선정되기 위하여 자의든 타의든 공공성을 띤 작업 경험 혹은 사회적 참여의 경험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공공미술에 대한 정부의 요청으로 제도 속에 자리잡은 공공미술은 예술가, 시민, 행정가 사이의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공공’이라는 용어가 붙음으로써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대전제를 간과함에 있어서 나온 결과이다. 서구의 공공미술을 성찰없이 수용한 점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한국의 공공미술(Public Art)(참고1)*을 한국미술계 안에서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비평적 장이 아직 미성숙한 탓이 아닐까 문제를 제기해본다.
본 연구에서는 앞으로 한국의 공공미술이 가지고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선행 연구 분석을 바탕으로, 2019 올해의 작가상 후보였던 박혜수 작가의 <대화 프로젝트 vol.4 – 우리가 모르는 우리> 전시를 살펴볼 예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약 6개월 동안 열린 전시 동안 박혜수 작가는 수집가로서, 예술가로서, 진행자로서 역할을 바꾸어가며 사회/집단의 보편적 가치와 개인의 가치를 가시화 시키며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하고,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작업을 완성시켜 나아갔다. 이번 전시는 박혜수 작가가 지난 10여 년간 작업을 통해 관객에게 던진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지만, 본 연구에서는 올해의 작가상에서 선보인 과정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며, 어떻게 예술의 자율성과 공공성이 상호보존되며 예술의 공공적인 기제를 살펴봄에 의의를 갖는다.
2. 예술의 자율성과 공공성
공공미술, 퍼블릭 아트, 커뮤니티 아트, 공동체 예술, 행동주의 미술 등,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특정 기조 아래에서 다음과 같은 이름의 예술 행위들이 지역 곳곳에서 벌어졌다.이는 마치 유행이라고 할 만큼, 공공성과 사회성이 짙은 예술 작업들에 대한 외부의 관심이 비대해짐에 따라 예술가들은 예술의 자율성이 무시되고, 요청 받고 있는 공공성에 얼마나 부합한지 피력하려 애쓰며 위장된 공공미술을 발명하도록 강요받았다.(참고2)* 이에 대해, 김준기는 예술의 공공성이 제도화되면 될수록, “공공성과 자율성의 공존”의 문제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매우 심각한 논점을 양산하며, 이제는 전근대적인 주문생산이 아니라 자율성에 근거를 둔, 예술가 주체가 자발적으로 주문을 요청하고 수용하는 관계로 진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예술의 자율성과 공공성이 이를 대립되는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호공존 가능한 가치로 보아야 한다. 예술은 그 자체로 자율성에 입각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사회체제라는 점을 고려하고, 공공영역의 문화 행정은 예술의 자율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 다음, 예술이 지닌 공공적인 기제가 작동할 수 있도록 이를 공공영역으로 끌어 나오는 것이 그 다음 예술가와 이론가들이 해야할 일이다.
(일부 생략)
3. 박혜수 작가의 올해의 작가상 2019 전시: <대화프로젝트 vol.4 – 우리가 모르는 우리>

[도판1] 설문> '당신의 우리는 누구인가?'_2019_300명 중산층 모집단 답변지_800x350(h)cm_반유화(정신과전문의) 협업 (출처: 박혜수 작가 홈페이지)
박혜수 작가의 전시실에 들어가자마자 맞닥뜨리는 것은 모바일로 설문조사를 할 수 있는 QR코드이다. 꽤 많은 질문들에 답을 하면서, 간접적으로 작가로부터 질문받기와 동시에 전시 관람을 시작하는 셈이다. ‘우리’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질문들과 4지선다형에서 많게는 9지선다형의 객관식 질문, 주관식 질문으로 이루어진 설문지이다. 1번부터 12번까지 답을 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쓴 질문과 이에 대해 주어진 보기를 보면서 작가의 ‘우리’에 대해 준 선택지에 관객은 동의하기도, 반대하기도 한다. 설문조사가 끝나면 옆에 나란히 걸려 있는 다른 이들의 설문조사 응답지를 볼 수 있다. 작가의 ‘우리’에 대해 반응한 타자들이 생각하는 ‘우리’를 보는 셈이다.
그 다음 동선을 따라가면 40분짜리의 <후손을 위하여> 다큐멘터리 영상 작품이 있다. 4명의 유품 정리사와 4명의 장례 지도사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무연고 사망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장소(집, 장례식, 영안실 및 화장터)들을 교차로 보여주는 이 영상은 고독사로 사망한 노인들의 사연을 추적하고, 이들이 죽음과 함께 처하게 되는 국가나 사회의 제도적 차별 등을 드러내며,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이 사회에서 야기하는 부조리와 폐해를 조명한다.
그 다음으로, 작가는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한다. <(주)퍼팩트 패밀리>는 국내에 이미 존재하는 역할대행업체들과 일본에서 성행 중인 ‘가족 대여’ 사업들의 사업 내용을 조사 한 뒤, 실제 서비스에 기반하여 만들어 낸 가상의 휴먼 렌탈 기업으로, 사업을 소개하는 카탈로그와 홈페이지, 광고물 등으로 구성된 작업이다.
박혜수 작가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특별한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는 작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본인이 궁금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누구나 다 알아듣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한다. 보편성, 보통이라는 것에 대해서 작가의 지난 작업에서 이어져오듯이 이번 올해의 작가상 2019에서 보여준 것 역시 ‘우리’라는 단어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오는 과정을 여과없이 그리고 효과적으로 전시함으로써 관객도 그 과정을 따라가며 질문하게 된다.
박혜수가 지난 10년 간 진행해 온 ‘대화’ 프로젝트는 이렇게 작가의 언어로 관객들에게 묻고 대답을 듣는 대화의 과정을 거쳐 얻어낸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수집된 데이터들은 작가의 해석과 예술적 가공/픽션 작업을 거쳐 한국사회에 내포된 집단 기억, 무의식 등을 가시화했다. 전시 공간에 재구성된 데이터 자료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거주하는 관객들의 끊임없는 연쇄적 개입을 이끄는 일종의 ‘대화 기계’가 되었다.*

[도판2] 토론극장 ‘우리_들’_2019_협업 기획: 이경미 / Forum Theater URI_2019_co-director Kyungmi Lee (출처: 박혜수 작가 홈페이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번 작업은 박혜수 작가의 내부에서 작동된 예술의 자율성에서 시작했다는 점과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예술의 공공적인 기제가 작동한다는 점이다. 전시 기간 동안 열리는 <토론극장: 우리_들>은 설문 보고서 <당신의 ‘우리’는 누구인가>의 해석 과정에서 작가가 도출한 5가지 이슈를 주제로 심리, 사회, 경제, 문화인류학 등 다양한 전문가들과 협업하여 설계한 렉처 퍼포먼스이자 일종의 심리극이다. <토론극장 : ‘우리_들’>(2019)은 전시기간 매달 1회씩 진행되며, 정신분석 전문의 성유미 (편가르기의 심리학-불만자들), 사회학자 노명우(배운 괴물들의 사회), 경제학자 최정규(안으로 향하는 신뢰와 밖으로 향하는 신뢰), 문화인류학자 김현경(누구에게, 어디까지 가능해?), 정신분석 전문의 반유화(탈감정사회, 저들과 같이 살 수 있을까)이 참여한다. 박혜수 작가와 다른 전문가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이 실험은 결과적으로 기존의 시스템과 지배 담론을 직접 바꾸려 하기보다, 관객 스스로 느끼고 생각해서 정치적인 주체가 되도록 한 것이다. 이렇듯 박혜수는 자신의 예술적 실천 즉, 픽션을 만들어내며 참여자들의 감각 및 지각 방식을 변화시킨다. 다시 말해, 위와 같은 관계적 프로그램들은 사람들이 기존의 감성계, 감성의 분할 체계에서 불편함 또는 불화/불일치(블로그 내 랑시에르 글 참고)를 느끼면서 이전에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비판적 미술은 불화를 촉진하는 미술이며, 지배적 합의가 모호하게 하고 지우려 하는 것을 가시적(visible)이게 하는 미술이다. 이는 기존의 헤게모니의 프레임 안에서 침묵 당한 모든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미술 실천에 의해 구성된다.”*
4. 나가며
니틀라스 루만은 예술의 기능은 세계 안에서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율성에 입각한 예술은 그 자체로 공론장이며, 예술의 자율성은 역설적으로 그것의 공공성으로부터 나온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예술이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제도 안에서 작동되어야만 하는 부품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예술의 탈을 쓴 말장난이나 휘발되는 놀이에 불과할 것이다. 사회 안에서 예술이 공공적인 기제가 발휘되기 위해서는 예술가의 독창적인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 우선이며, 이 다음 관객들의 라운드 테이블에 이를 올려두고 공론화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본 연구자는 이 공공미술(Public Art)가 앞으로 2000년대 한국의 공공미술이 지향해야하는 방향점이라고 생각한다.
(참고1) 도시 시설물 개선과 환경 개선을 위해서 특정 지역에 시범적으로 공공미술을 초대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 축은 지역 공동체구성원들의 참여를 통해 커뮤니티의 활성화를 프로그램화 하는 공공 미술이었다. 이 두 가지 축은 시설물을 예술화하는 작업으로서 공공미술과 커뮤니티 중심의 공공 미술로 구분될 수도 있으며, 물질적인 공공미술과 비물질적인 공공미술로 구분 지을 수도 있다. (김장언, 『불편한 대화』, 미디어 버스, 2018, p.111)
(참고2) 김장언은 2000년대 공공미술 담론의 장이 신자유주의가 야기할 사회 갈등과 분열을 봉합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위장된 공공미술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비판의 핵심은 누가 더 공공성을 창조적으로 발휘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책적으로 발명된 공공성이 어떻게 사회와 예술가들에게 위장의 공공성을 발명하도록 강요하는가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장언, 『불편한 대화』, 미디어 버스, p.116.)
<Reference>
- 김장언, 『불편한 대화』, 미디어 버스, 2018.
- 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양창렬 역, 현실문화연구, 2016.
- 김준기, <한국 사회예술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 논문, 2019.
- 진태원,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르>, 진보평론 63호.
- Chantal Mouffe, “Art and Democracy: Art as an Agnostic Intervention in Public Space,” in Open, No. 14, 2008, p. 12.
- 조주현, 박혜수의 《대화 프로젝트 Vol. 4 – 우리가 모르는 우리》 - <대립을 논쟁으로, 적대자를 상대자로 전환하는 심리 극장>, 2019, 국립현대미술관.
- 박혜수 작가 홈페이지, http://www.phs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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