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에 관한 담론은 그 자체가 텍스트이자 연구이자 텍스트 활동이다. 텍스트의 어떤 발화 주체도 심판자, 주인, 분석가, 고백자, 해독자의 위치로 놔두지 않는 사회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이론은 오로지 글쓰기의 실천과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 (본문 중)
I. 들어가며
우리가 작품(Work) 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전통적으로 어떤 분류/장르에도 속할 수 없는 모호함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언어이다. 이 모호함은 기존의 영역과 새로운 대상의 상호충돌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텍스트(Text)이다.
바르트는 작품(Work)을 대하는 독자의 태도 변화를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바르트는 독자 들이 작품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거부한다. 전통적 독서방식을 일방적으로 부정한다기보다는 저자가 작품 속에 담은 의미를 읽어내는 것을 초월하여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함으로써 저자가 존재하 지 않는 작품 속 빈 부분을 채워넣는다. 텍스트는 이런 과정적이며 방법론적인 대상을 의미한다. 『작품에서 텍 스트로』는 바르트가 텍스트에 관하여 7가지 (방법론, 장르, 기호, 복수성, 계보, 읽기, 즐거움) 방식으로 접근 (touch)한다.
II. 작품에서 텍스트로
1. 멈추지 않는 텍스트 (p.39)
작품이 서점, 카탈로그, 시험 목록 등에서 보여지는 ‘현실(reality)’이라면 텍스트는 현실을 비추는 표상의 과정 이며 일정한 법칙에 따라 (혹은 그 법칙과 정 반대로) 목소리를 내는 ‘실재(the real)로 볼 수 있다. 즉, 작품은 손 에 잡히지만, 텍스트는 언어 안에서 잡히며 오로지 담론의 움직임 안에서만 존재한다. 텍스트는 작품의 해체가 아니며, 텍스트의 상상적인 꼬리가 바로 작품이다. 텍스트는 작업 활동에 의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 그 결과 텍 스트는 멈출 수 없다. 텍스트를 구성하는 움직임은 횡단의 움직임이다.
2. 일반 견해(doxa) 너머, 분류의 파괴 (p.40)
텍스트는 기존의 장르나 위계질서를 넘어선다는 것 그리고 반론적(Paradoxal)이라는 것이다. 분류한다는 것을 어떤 기준이나, 규칙, 규범과 같은 것으로, 즉 일반견해로 닫혀진 것으로 이해했을 때, 텍스트는 그 닫혀진 것 너 머에서 멈추지 않고 횡단하며, 과거의 분류를 파괴하는 힘, 전복하는 힘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텍스트는 일반 견해의 한계선 뒤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한계를 체험하게 되고, 일반 견해의 한계선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텍 스트는 반론적 (para-doxal)이라고 할 수 있다.
3. 기의를 무한히 지연시키는 기표들의 유희(p.41)
작품은 기의로 닫힌다. 두가지 양상의 기의가 있는데, 하나는 기의가 명백한 것 또다른 하나는, 기의가 비밀스러 워서 추적해내야 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작품은 해석학 즉 해독의 대상이 된다. 반면 텍스트는 기의의 무한한 지연을 행한다. 텍스트는 기표의 영역이다. 기표의 무한성(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달력처럼)은 유희와 관련이 있 다. 이 무한함은 단절(disconnections), 겹침(overlappings), 변형(variations)의 움직임에 따라 실현되며, 텍스트 의 연결(associations), 인접(contiguities), 추진(carryings-over)은 상징적인 에너지의 분출과 함께 가능하다. 텍 스트는 극단적으로 상징적이다. 작품을 상징적 속성으로 읽어낸다면, 작품은 하나의 텍스트이다. 텍스트는 언어 로 복원되기 때문에, 보기에는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탈중심적이며 닫힘이 없다.
4. 환원 불가능한 입체적 복수태 (p.42 *p.32 참고)
텍스트는 환원할 수 없는(irreducible) 복수성이다. 이 복수성은 의미가 여러개 존재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통 로(passage)로서의 텍스트를 가로지르며 느끼는 모든 것들이다. 통로를 가로지르며 수집하는 기호들의 결합은 매번 독창적이어서 텍스트는 일회적이다.즉, 텍스트의 복수성은 내용의 모호함이 아니라, 기표들이 텍스트로 잘 짜여져 입체적으로 드러난 복수성이다.
5. ‘종의저자’ 혹은 ‘손님’으로서의 저자 (p.43-44)
작품은 저자와의 일치를 전제로 하며, 저자는 작품의 아버지이자 소유자이다. 반면, 텍스트는 아버지를 기입하 지 않고도 읽혀질 수 있다. 텍스트의 상호텍스트성은 모든 기원을 제거하기 때문에, 저자는 텍스트에서 ‘손님’ 혹은 ‘종이저자’의 역할을 한다. 이로써 저자는 텍스트의 원천이 될 수 없으며 텍스트에 기여하는 하나의 유희가 된다.
6. 글쓰기와 읽기 사이의 거리 축소 (p.45)
텍스트를 읽는 것은 글을 쓰는 것과 다름 없음이다.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로부터 건져내서 독자로 하여금 유희, 행동, 생산, 실천하도록 만든다. 이는 텍스트가 글쓰기와 읽기 사이의 거리를 감소시킬 것을 요구한다. 텍스트는 놀이를 하듯 스스로 유희를 한다. 음악을 비유로 들어, 독자는 텍스트를 유희(play)할 수 있어야 한다. 독자는 텍 스트의 공동저자로서 텍스트를 완성시킨다. 텍스트는 독자에게 실질적인 협동을 요구한다. 지루하다는 것은 독 자 스스로가 창조하지 못하게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7. 분리되지 않은 즐거움 (p, 46)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내는 즐거움은 ‘소비의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읽을 수 있지 만, 동일하게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작품들의 생산에서 나를 떼어 내며, 소비로서의 읽기는 분리된 즐거움이 다. 하지만 텍스트를 읽는 것은 분리되지 않은 즐거움이다. 기표의 질서가 없는 텍스트는 어떤 언어도 우열을 가 릴 수 없으며, 언어들이 지속적으로 순환하는 공간으로서 사회적 유토피아에 기여한다.
III . 나오며
텍스트에 관한 담론은 그 자체가 텍스트이자 연구이자 텍스트 활동이다. 텍스트의 어떤 발화 주체도 심판자, 주인, 분석가, 고백자, 해독자의 위치로 놔두지 않는 사회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이론은 오로지 글쓰기의 실천과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
<Reference>
- 롤랑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 작품에서 텍스트로,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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