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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론

전시제작자로서의 작가, 하럴드 제만에 관하여

조각가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는 210kg의 녹인 납을 전시장 벽과 타일 바닥에 흩뿌렸고 (<뿌리기(Splashig)>(1969)), 요셉 보이스는 녹인 마가린을 전시장 모퉁이에 발랐다(<지방 모서리(Fettecke)>(1969), 전시장 벽면의 한 부분을 제거한 프랑스 출신의 작가 로렌스 와이너(Lawrence Weiner)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냥 벽 일부를 제거하고 있다고 답했고,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는 가연성의 물질을 쌓아 놓고 전시의 마지막 날에 이를 전부 불태웠다. 그뿐만 아니라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는 레킹볼(wrecking ball)을 사용하여 전시장 앞의 보도블록을 깨부쉈다. [본문 중]


 하럴드 제만(Harald Szeeman, 1933~2005)은 ‘큐레이터’의 역할을 재정의한 인물로, 큐레이터이자 예술가이자 미술사가 등으로 설명된다. 큐레이터(Curator)는 어원으로 보면 살펴보는 자(care)라는 뜻으로 전통적인 의미에서 값비싼 사물들을 ‘케어’하는 사람이다. 현대에 와서 큐레이터는 기획자, 행정가, 교육자 등 일인다역의 일을 수행해내는 사람으로 이해 되고 있다. 여러 역할을 뜻하는 타이틀인 만큼, 오늘날 국내 지면에서도 큐레이팅(curating)이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다른 단어로 번역/대체되지 않는 의미로 굳혀진 듯 한 이 표현을 하럴드 제만이라는 인물에 주목해봄으로써 미술계 안에서 통용되는 이 단어가 어떻게 동시대성을 담고 있는지 보고자 한다.

 이번 글쓰기에서는 제만이 큐레이팅 했던 전시, 다시 말해 그가 예술에 대해 가진 태도를 볼 수 있는 전시를 짧게 소개한 뒤, 그가 동시대 미술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살펴보고, 더 넓은 의미로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점을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제만이 기획한 대표적인 전시로 <당신의 머릿속에 거하라: 태도가 형식이 될 때(작품-콘셉트-과정-상황-정보(Live in Your Head: When Attitudes Become Form(Works-Concepts-Process-Situations-Informations)>(1968) 라는 긴 제목의 전시가 있다. 줄여서 ‘태도가 형식이 될 때’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제목은 제만이 어느날 작가 잔 디벳의 작업실에 들렀다가, 그가 책상에 있는 잔디에 물주는 모습을 보면서, 예술가의 행위가 전시될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태도가 형식이 될 때’ 로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1]  제목이 붙여진 유래처럼, 이 전시는 완성된 물리적 형태의 작업 결과물로서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지 않은 작업들의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전시 였다.

 참여 작가들의 작업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조각가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는 210kg의 녹인 납을 전시장 벽과 타일 바닥에 흩뿌렸고 (<뿌리기(Splashig)>(1969)), 요셉 보이스는 녹인 마가린을 전시장 모퉁이에 발랐다(<지방 모서리(Fettecke)>(1969), 전시장 벽면의 한 부분을 제거한 프랑스 출신의 작가 로렌스 와이너(Lawrence Weiner)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냥 벽 일부를 제거하고 있다고 답했고,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는 가연성의 물질을 쌓아 놓고 전시의 마지막 날에 이를 전부 불태웠다. 그뿐만 아니라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는 레킹볼(wrecking ball)을 사용하여 전시장 앞의 보도블록을 깨부쉈다.

Michael Heizer, Bern Depression, 1969.

Lawrence Weiner

 일부 작품들의 설명만 보더라도, 그 당시 전시는 새롭고, 기이하며, 파격적이었다.[2] 이 전시를 끝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관장직에서 물러난 뒤 독립 큐레이터로서 더욱 전위적인 전시들을 기획 한다. 1972년 <카셀 도큐멘타 5(documenta 5)>의 총감독이 되면서 200명 이상의 다양한 장르(개념미술, 퍼포먼스, 비디오 아트, 팝 아트, 포토 리얼리즘 등)의 예술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를 주최한 시 당국과의 마찰과 일부 대중의 비판으로 제만은 1973년에 <강박의 미술관>이라는 가상 기관을 만들어 자신이 원하는 주제와 장르의 예술을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실험 공간을 만든다. 제만의 할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는 오브제를 모아 전시를 하거나, 비제도권의 예술가들 (예술적 문화에 의해 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제작된 작품들[3])과 제도권 안에 있는 예술가들이 모두 참여하는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국내 논문 중 2019년에 발표된 <강박의 박물관 하럴트 제만과 아웃사이더 아트>[4]에서는 제만이 주변부 예술을 미술계 중심에 소개한 전시 방식을 통해 정신 병리학 또는 미술치료의 관점에서 정상이 아닌 이들의 작품을 분석하는 제도권 ‘밖’의 예술에 대해 연구한 장 뒤뷔페(Jean Dubuffet)의 한계를 짚는다. “나에게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제만의 말처럼, 그가 보여준 전시들은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경계를 지우며 그가 주목했던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창조력이 만들어냈다. 무형에서 유형을 창조해낸 것이 아닌 제만만의 큐레이팅을 통해 유형에서 유형의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현대 문화예술계는 간-학제적인 연구를 지향하고, 관습적으로 나눠온 장르나 구분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더 나아가 소외된, 주변부의 타자들의 예술에 주목하고 있는 동시대 미술사 흐름에서 제만이 반세기 전에 전위적으로 시도해온 그의 전시 방식은 분명히 되짚어볼 의의가 있다. 큐레이터로서 예술가인 그는 2020년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미디어/매개로서 존재하며, 사이사이를 드러내주는 예술의 역할을 다시 한번 환기 시켜주고 있다.

 

[1] 진휘연, <《When Attitudes Become Form》, 1969 년 아방가르드 미술의 집결장>,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19, 2003.6, p.106.

[2] 이 전시는 미국의 기업인 필립 모리스에서 약 2만5천 달러를 지원 받은 전시였다. 당시 필립 모리스 유럽 지사장인 머피(John A. Murphy)  는 전시 서문에 이 전시를 ‘새로운 예술’이라고 썼다.  그는 이 전시가 ‘새로움’을 지향하는 기업의 가치와 닮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유럽의 예술가들은 미국 기업의 후원에 반대했다. 그러나 하럴드 제만은 스폰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위 논문, p.106.)

[3] Jean Dubuffet, Prospectus et tous écrits suivants, Tome I (Paris: Gallimard, 1967), pp. 201-202. 재인용, 한의정, <강박의 박물관: 하랄트 제만과 아웃사이더 아트>, 현대미술사연구 46, 2019.12, p.10.

[4] 한의정, <강박의 박물관: 하랄트 제만과 아웃사이더 아트>, 현대미술사연구 46, 2019.12, 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