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
랑시에르에게 예술의 자율성은 삶에서 배제되고 비가시화된 것들을 감각중추에 의해 가시화하는 활동이다. 예술의 타율성은 예술의 자율성을 통해 생긴 새로운 감각들이 삶에 어떤 균열을 가지고 오면서 예술의 고유한 영역에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영역이 되어 가는 운동을 의미한다. 이는 예술이 다른 영역의 힘이나 권력에 영향받거나 종속된다는 의미의 타율성이 아니라, 예술적 자율성을 보존하기 위한 타율성으로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본문 중)
1. 들어가며
랑시에르는 미학을 개인적인 지각 양식과 사회적 제도 안에서 우리가 경험한 것을 나누고, 재구조화시키는 서사(plot)의 형태로 바라본다. 특히 이 서사 안에서 우리의 경험에 주목한다. “개인들과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예술 세계 및 새로운 삶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감각적 경험 — 미감적인 것 (the aesthetic)”(467)은 예술을 위한 예술(the edifice of the art of the beautiful) 그리고 삶을 위한 예술 (the edifice of the art of living)의 “그리고”(468)가 된다. 다시 말해, 감각적 경험(심미적 경험)은 예술의 미와 삶의 미의 고리로서 둘을 연결 시킨다. 이는 미학적 체제(참고1)*를 이루는데, 미학적 체제 내의 정치를 이해하는 것이 자율성과 타율성을 연결짓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 랑시에르는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를 만드는 ‘그리고’에 관해 세가지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2. 본문
(1) 여신의 감각중추 (Sensorium of the goddess)
랑시에르는 주노 루도비시라고 알려진 그리스 조각상을 예로, “아무런 의지나 목적의 흔적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471)에 자족적(self-contained)이라고 말한다. 이 자족적인 조각상 앞에 놓인 관객은 ‘자유로운 외양’(free appearance)앞에 놓임으로써 특별한 종류의 자율성을 갖게 된다. 이 자율성은 어떤 권력이나 힘이 제거된 상태로 경험의 자율성을 말한다. 이는 “예술작품(artwork)은 예술의 작품(work of art)이 아닌 한에서 자율성의 감각 중추 속에 참여”(471)하는데, 다시말하면, 자유로운 외양으로서 예술작품(artwork)은 예술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의 작품(work of art)과 달리, 삶의 형식(a form of life)의 외양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 ‘그리고’ 삶의 상호침투를 말한다.
랑시에르는 타율성과 연관된 자율성의 개념 변화에 대해서 강조한다. 삶의 자율성이 드러나는 곳에서 예술은 전혀 자율적이지 않으며, 예술의 생산이라는 것은 삶의 자기표현에 불과한 것으로 머물게 된다. 특히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 예술은 언제나 ‘예술이 아닌 한에서’ 예술이 된다”.(472) 이 때, 예술은 언제나 심미화(aestheticization)되며, 이는 곧 ‘삶의 형식’으로 정립된다. 그래서 예술의 미학적 체제의 핵심은 예술이 자율적인 삶의 형식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읽힌다. 1) 자율성이 삶보다 강조될 수 있고, 2)삶이 자율성보다 강조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세 가지 시나리오가 나온다. 1) 예술은 삶이 될 수 있다. 2) 삶은 예술이 될 수 있다. 3) 삶과 예술은 그들의 속성들을 교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개의 시나리오는 세 가지 형태의 시간성에 따라 서사를 만들어냄으로써 세 가지 공형상화(configuration)를 산출한다.
(2) 새로운 집합적 세계를 구성하기 (Constituting the new collective world)
첫 번째 시나리오는 삶이 예술이 되는 시나리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술의 문제가 자기 교육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곧 새로운 감각중추를 형성하고, 이로써 새로운 집단적 에토스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정치의 대안은 예술의 경험, 새로운 집단적 에토스의 구성으로 간주되는 심미화가 될 수 있다. (미학의 정치)
말라르메의 예시에서 시인은 추억(reminiscences)을 통해서 재창조하는 업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 때, 시인의 순수한 글쓰기(pure practice of writing)는 인간에게 머물러있는 것(human abode)들을 다시 재구조화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예술은 무엇보다 공통의 세계 속에서 거주(dwelling)하는 문제”이며 이는 공통적인 시간성을 공유한다.
(3) 예술의 삶의 틀을 짜기 (Framing the life of art)
두 번째 시나리오는 ‘예술이 되는 삶’ (예술을 위한 예술)이다. 랑시에르는 박물관의 서사를 이야기 하는데, 예술과 삶을 분리시키는 것으로서의 박물관과 예술을 역사화, 문화화 시키는 것으로서의 박물관에 대해서 모두 틀렸다고 말하며, 박물관의 시나리오는 '살아 있는 형식'으로 역사화된 예술을 전시한다고 말한다. 즉, 박물관은 예술의 시공간을 전시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형식의 정신’ (spirit of forms)이 미감적 경험을 특징짓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들어 예술작품을 그 자체의 위치로 두고, 역사성을 부여함으로써 미감적 경험의 정치적 특징을 갖게된다고 말한다. 조각상은 조각상 자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방식과 집단적 삶 사이의 거리를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됨으로써 예술이 된다. 조각상을 만든 이는 한계를 가지며, 이로써 조각상은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즉, 조각상의 자율성은 내면성의 결여에서 나온다.
위와 같은, 예술의 삶이라는 서사가 궁극적으로 예술의 종말이라는 서사와 결부되어 있다. 이 서사는 예술이 비예술이 아니게 될 때, 예술도 더 이상 예술이 아니게 된다고 주장하는 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즉 이 말은 아마도 삶과 단절될 수 없는 예술이 삶과의 단절을 선언하는 순간 예술적 삶이라는 것 역시 그 특징이 사라지기에, 즉 더 이상 예술로 규정될 수 없는 예술이 되어버려 예술이 종말에 이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4) 골동품 상점의 변모 ( Metamorphoses of the curiosity shop )
세 번째 시나리오인 삶과 예술의 속성 교환을 다루고 있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미학적 체제의 정치적 전체 모토는 ‘감각적으로 이질적인 것을 구원하자’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구원 방식 중 하나는, 예술적 시간성의 복수화이다. 그래서 이것은 삶이 되는 예술 내지 예술이 되는 삶, 즉 예술의 ‘종말’ 같은 직선적인 시나리오를 복잡하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폐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나리오들을 잠복성(Latency)과 재현재화를 통해 복수(multiplication)화 시킨다. 그래서 과거의 작품은 새로운 것의 원료가 되며, 다시 읽히고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박물관은 예술의 종말로 인도하는 ‘형식의 삶’이라는 경직된 서사를 몰아냈으며, 새로운 실천으로 인도하는 예술의 새로운 가시성의 틀을 짜는 데 일조하게 된다.
두번째는 이러한 복수의 시간성은 예술의 경계선들의 침투 가능성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됨으로써 예술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일종의 ‘변모’의 지위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과거의 작품들은 작품이 아니게 되거나, 일상 사물이 작품이 되는 식으로 새로운 삶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골동품은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재)심미화된다. 결국 이질적으로 감각적인 것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어떤 대상이든 경계선을 넘어서 미감적 경험의 영역 속에 다시 거주할 수 있다.
이처럼 예술과 삶의 상호 침투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일상적인 것을 비범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또한 비범한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종의 변증법적 과정이기도 하다.
(5) 무한한 복제 (Infinite Reduplication)
이 부분은 위에서 언급된 감각적으로 이질적인 것을 구원하려는 시도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이 갖는 모순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평범한 것이 예술화되는 것은 곧 예술의 보편성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것은 예술의 역설적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end of art’ as the homogenization) 즉 모든 것이 예술적이게 되어, 결국 예술의 경계가 파괴되고, 그래서 아무리 평범한 것일지라도 예술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점까지 나아가게 된다. 상품과 예술 작품 간의 식별불가능성이 발생하며, 이는 곧 비판적 담론의 식별불가능성으로 이어진다.
(6) 전위예술의 엔트로피 (Entropies of the avant-garde)
예술의 탈미학화의 딜레마에 대한 두 번째 답변, 곧 ‘이질적인 감각적인 것’의 힘을 다시 옹호할 수 있는 대안적인 방식을 촉구한다. 두 번째 답변은 예술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 것은 예술이 낭만주의적으로 자신의 경계선들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답변은 공통적인 삶의 미학화의 형식들로부터 예술을 분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요구는 1) 예술을 위해서, 2) 예술의 해방적인 힘을 위해서도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은 모두 공통적인 요구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감각중추들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487)
이런 맥락에서 예술의 자율성은 이중적인 타율성(double heteronomy)임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쇤베르크의 음악은 자본주의적 분업과 상품화의 치장을 비난하기 위해서는 그 음악은 이러한 분업을 훨씬 더 멀리 밀고나가야하며, 자본주의적인 대량 생산물보다 훨씬 더 기술적이고 더 ‘비인간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역으로 이러한 비인간성은 오히려 억압되어온 것의 얼룩이 나타나도록하며, 작품의 완벽한 기술적 배치를 파열시킨다. 이렇게 전위예술 작품의 자율성은 두 개의 타율성 사이의 긴장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전위예술은 자신의 자율성을 지탱하는 타율성의 힘을 훨씬 더 강조해야 한다.
(7) 상상력의 패퇴? (Defeat of the Imagination?)
상상력은 감각할 수 있는 것과 감각 너머에 있는 것 사이의 그 간극을 경험할 때, 패배한다. 리오타르는 이를 재현 불가능성과, 그리고 감각적인 것과 상상할 수 있는 것 사이의 불안정성으로서 현대 예술 공간을 정의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미학적 체제와 재현적 체제의 대립은 재현 불가능한 것의 예술과 재현 예술 사이의 순전한 대립으로 귀속된다. 그러나 이런 맥락에서 현대예술작품들은 재현불가능한 것에 대한 윤리적 증언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의 상실을 랑시에르는 미학의 재현적 체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본다. 감각할 수 있는 것과 상상할 수 있는 것 사이의 불안정성은 형식의 복수화 때문이다. 따라서 미학적 체제에서는 어떤 것도 재현불가능하다.
3. 나가며
랑시에르의 근본적인 목적은 예술의 종말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예술의 종말을 예술의 삶의 이면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저자는 미학적 정식은 예술의 삶을 두 개의 소실점, 곧 단순한 삶이 되는 예술이나 단순한 예술이 되는 삶 사이에 위치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 장에서 핵심적인 메세지를 한 문장으로 이야기하는데, 다음과 같다. “미학적 체제에서 예술의 삶은 정확히 말하면 왕복운동을 하는 것, 곧 타율성에 맞서 자율성을 실행하고, 자율성에 맞서 타율성을 실행하고,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한 가지 연결에 맞서 다른 연결방식을 수행하는 것이다.” 즉, 랑시에르에게 예술의 자율성은 삶에서 배제되고 비가시화된 것들을 감각중추에 의해 가시화하는 활동이다. 예술의 타율성은 예술의 자율성을 통해 생긴 새로운 감각들이 삶에 어떤 균열을 가지고 오면서 예술의 고유한 영역에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영역이 되어가는 운동을 의미한다. 이는 예술이 다른 영역의 힘이나 권력에 영향받거나 종속된다는 의미의 타율성이 아니라, 예술적 자율성을 보존하기 위한 타율성으로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참고1) 랑시에르는 예술 체제를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1) 윤리적 체제(예술작품이 자율성을 갖지 못하며, 예술작품들이 진리나 공동체에 미치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묻는 이미지들과 관계한다. 이는 예술에 대한 플라톤적 사유에 상응한다.) 2) 재현적 체제(예술작품이 모방의 영역에 속하며, 진리나 공동체의 유용성이라는 규칙과는 무관한 것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리고 질료에 형상을 부과하는 방식들을 포함한다. 심지어 장르들 사이의 위계, 주제에 대한 표현의 적합성, 예술들 사이의 상응성과 같은 내재적 규범들이 중시된다.) 3) 미학적 체제(규범성 및 형상과 질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며, 예술은 이제 그 자체로 정의된다.)가 그것이다. (자크 랑시에르, 미학 혁명과 그 결과 (The Aesthetic Revolution and Its Outcomes), 뉴레프트리뷰, p.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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